『병자호란』 감상 by 푸른매


 『병자호란』은 좋은 책입니다.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을 거쳐 병자호란으로 가는 길,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폭넓게 다루면서도 쉽게 쉽게 읽힌다는 점이 강점이죠. 저자도 이 시기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한명기 교수고요. 사료의 광범위한 인용도 "병자호란에 관한 최초의 본격 통사"라는 띠지의 광고 멘트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직전에 읽은 『사회학적 상상력』이 끔찍하게 지루해서 그런지, 370페이지짜리 책 두 권을 다 읽는데 이틀이 안 걸리더군요.

 병자호란은 한국사에서 가장 참담한 패전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은 7년이나 싸워 결국 이기기라도 했지, 병자호란은 손쓸 틈도 없이 나라가 망할 뻔 했죠. 게다가 임진왜란의 결과는 (불안정하긴 하지만) 현상으로의 복귀였던 반면 병자호란의 결과는 조선의 대외관계, 나아가 동아시아 국제질서 전체의 대변동이었으니까요. 『병자호란』은 이 충격적인 패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묻습니다. 물론, 핵심 원인으로는 인조와 집권세력인 서인이 지목되죠. 책이 인조반정에서 시작하는 것에서 알 수 있지 않나요?

 하지만 그 논리는 "친명 사대주의적인 인조-서인 정권이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뒤집어 엎고 친명정책을 밀어붙인 끝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인조가 친명파였던 것은 맞지만 그것은 인조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의 취약한 정통성이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명의 책봉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인조 역시 후금을 가급적 자극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인조의 외교정책은 명에 좀 더 무게가 실리긴 했으되 근본적으로 광해군의 외교정책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조선이 '종속변수'였"으며 "'형의 나라' 명, '형제의 나라' 후금과의 관계를 '모두'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다가 끝내는 파국으로 내몰렸다"는 서술에서 이런 인식이 드러납니다.

 한명기 교수는 외교정책 기조 그 자체보다는 인조 정권의 냉철한 전략적 사고 부재, 그리고 정책 추진에서의 무능을 비극의 핵심으로 지적합니다. 명 사신에게 바친 어마어마한 뇌물과 초기 개혁 시도의 실패, 서북지역의 방어전력을 증발시킨 이괄의 난부터 시작해서 반청적 내용의 유시를 조선 땅 안에서 도주중이던 용골대 일행에게 탈취당한 건, 그리고 김경징과 김자점 등의 실패한 지휘관 인사까지요. 청에 맞서 자신을 지킬 힘을 길러야 할 상황에서도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운영하다가 맞이한 파탄이 병자호란인 것이죠. 미국과 중국간의 힘의 전이가 일어나는 시기에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장기적으로 자체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병자호란』이 던지는 결론입니다.

 저는 이 결론이 얼마나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력을 증대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국가가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현실에는 그 목표 달성을 어렵게 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심각하게 겪고 있었습니다. 인구 5,000만짜리 한국은 13억의 중국과는 덩치 차이가 너무 나고요. 한국이 국력을 키운다고 해서 중국에게 무언가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병자호란』이 줄곧 보여준 역사 자체에 대한 탁월한 시각에 비해 그 함의는 너무 허망합니다.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물론 인조 정권이 보여준 실패는 '역량 확보를 위한 장기적 전략 추진'이라는 교훈에 타당성을 부여하긴 합니다. 끔찍할 정도의 무능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의 결론은 이 좋은 책의 마침표로는 어쩐지 아쉽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네요. 어쩌면, 이는 역사에서 현실에 적용할 교훈을 곧바로 추출하려는 시도 자체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대로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지는 않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부상하는 강대국 청의 팽창적 정책 추진을 보다 유심히 고려하면서 "신흥 강대국은 팽창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를 억제하고 봉쇄할 준비를 해야한다"는 좀더 구체적인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다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병자호란』은 여전히 좋은 책입니다. 폭넓은 역사적 시야가 단순히 조선과 청, 그리고 명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힘의 전이와 조선의 전략적 지위 변화가 조일관계에 미친 영향까지 포착한 부분이 대표적이죠. 후금의 부상으로 북방에서 엄청난 안보 위협에 직면한 조선이 남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일본에게 점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다가 마침내는 후금-청을 견제하기 위한 안보 파트너로 인식이 변화하는 부분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결론을 내리죠. 『병자호란』은 아마도 현재까지 병자호란 전체에 관한 한 가장 탁월한 교양서적일 겁니다. 사실 일반적인 교양서적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죠. 교양서적과 학술서적의 중간쯤 아닐까요. 시야는 폭넓고 사료는 풍부하게 인용되며, 관점은 균형잡혀 있습니다. 글은 읽는 맛이 있고요. 결론이 좀 싱겁다는 단점은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직접 현실에 대한 답을 구할 수는 없다는 점만 유념한다면, 이 책은 조선이 직면해야 했던 파국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그것은 무엇이었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사족이지만, 한명기 교수의 저작 중에서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한국사 교양강의를 들을 때 레포트 주제를 광해군으로 선택했었거든요. 레포트는 한명기 교수의 호의적 관점보다는 『조선의 힘: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의 오항녕 교수가 전개한 비판적 관점을 받아들여 광해군에 대해 부정적으로 써서 제출했었죠. 지금도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인조 정권의 치명적인 난맥상을 보고 있자니 오항녕 교수의 인조 옹호도 무리한 부분이 많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솔직히 병자호란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을 지키려던 문명국의 기개"라는 오항녕 교수의 주장은 황당하기까지 하죠. ㅋ


덧글

  • shaind 2014/07/14 08:48 # 답글

    추천 감사합니다. 재미있을것 같네요.

    병자호란은 신흥 강대국이 팽창의 주목적지가 아닌 방향으로도 (어느정도는 "방어적"인 동기에서) 공격적 성향을 드러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군요. 비스마르크도 팽창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두들겨 주는 데 주저가 없었죠.
  • 푸른매 2014/07/15 19:18 #

    비스마르크는 세력균형을 뒤집어 엎고 패권을 지향하는데는 관심이 없었지만 청나라는 달랐던 점도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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